8~9세기 중국의 역사
8~9세기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당나라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어요. 당나라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과 베트남 등 주변국과의 교류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신라와는 활발한 무역활동을 펼쳤는데요, 신라는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이 과정에서 장보고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어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8~9세기 중국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8~9세기 중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아무래도 황소의 난이겠죠?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러 간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어요. 결국 환관인 양국충이 권력을 잡았고, 양씨 가문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마침내 황소가 이끄는 농민군이 장안을 점령하면서 황위에 올랐어요. 이후 6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당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당나라의 황소의 난
당나라의 황소의 난의 배경,과정,결과를 알아볼까요?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농민 반란입니다. 당나라는 무측천 시기 이후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관료들이 부패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절도사 세력이 커지면서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지방관료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줄어들면서 각 지역에서는 세금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879년 안녹산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황제였던 숙종은 환관 위충현 등 간신배들을 중용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안녹산은 780년 거병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군에게 패배하였고, 각지에서 도망친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다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809년 토번과의 전투에서 패하며 군대 대부분이 전멸했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황소의 난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나요?
안녹산은 본래 서역 출신 군인이었는데, 숙종이 즉위하자 조정에 출사하여 관직을 얻었습니다. 또한 동생 안경서 역시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두 형제 모두 권력욕이 강했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751년 돌궐족이 쳐들어오자 형인 안경서는 출정했지만 전사하였으며, 이로 인해 안녹산은 더욱 큰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둘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급기야 750년경부터는 노골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래 진사 시험 합격자는 매년 100명씩 선발되었는데, 실제로는 70~8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인원은 하급관리직이라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기도 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게다가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마저 겹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800년 가을 전국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황소의 난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당시 황하 유역 일대는 인구밀도가 높고 토지가 비옥해서 농업 생산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일찍부터 상업 활동에 종사하거나 상인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강남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하지만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주로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구조에서도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즉 산동지방은 상공업 중심지였고, 강남지방은 농업 중심지였습니다. 자연히 산동지방 호족들은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었고, 강남지방 지주들은 땅을 지키는데 급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동의 경우 황실과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강남지주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불만은 커져갔고, 자연스레 민란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황소의 난은 왜 실패했나요?
결국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빈부격차 해소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황소의 난 기간 동안 수많은 군벌들이 나타났지만, 지배층 내부의 분열 및 극심한 재정난으로 인해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조세부담이 증가되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민심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9세기 초부터는 송나라가 성장했는데요, 북쪽으로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남쪽으로는 진나라가 있었지만 두 나라는 모두 힘이 약했어요. 반면 송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경제발전 또한 눈부시게 이루어지면서 빠르게 발전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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