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중일의 관계

8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

by 오늘이최고-기분좋은 오늘을 만들어 드립니다. 2023. 8. 4.
반응형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갖는 감정은 복합적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침략자로서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현재까지도 독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문화적으로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한류 열풍 속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 문화를 즐기고 있으며, 이는 양국 간의 우호 증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지요. 최근 한일관계 악화로 인해 민간 교류마저 위축되고 있지만, 여전히 두 나라 사이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8세기 무렵의 동아시아에서는

 

8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백제와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 지방을 차지하고 남하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였고, 백제는 마한 지역을 통합하고 황해를 건너 중국 요서 지방과 산둥 반도 그리고 일본 규슈 지방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삼국의 팽창 과정에서 신라 역시 낙동강 유역 가야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만을 신라에게 넘겨주었을 뿐,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 지역은 계속해서 지배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신라는 나당전쟁을 일으켜 당나라를 몰아내고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습니다.

8세기 무렵의 일본땅의 상황은

한편 7세기 말~8세기 초 왜국은 오랜 기간 분열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때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불교를 적극 수용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고 관위 12계를 제정하는 등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견수사 파견 및 국교 재개 요청 등을 통해 대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대 일본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국제 질서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신라와도 다시 접촉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라-왜’ 관계의 시작입니다.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과 8세기 상황

 

당시 신라는 지증왕 때부터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고 동해안 일대를 개척했으며, 진흥왕 때에는 함경도 남부까지 진출했고 이어 선덕여왕 때에는 김춘추를 보내 군사 동맹을 맺었고, 진덕여왕 때에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왜국은 남북조 시대 이래 야마토 정권이 쇠퇴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에야 비로소 국내 정세가 안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주로 바다를 이용하여 교역하던 수준이었으나, 점차 육로를 통한 교섭이 활발해졌던 것입니다. 한편 538년 양원왕 재위 시절 승려 혜자는 장안성 동쪽에 절을 짓고 대승정이라는 관직을 받아 머물면서 불경을 강의했는데, 이로 인해 위진남북조 시대 이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통로가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들어온 유학생들을 통해 서역의 앞선 기술 문명이 전해지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종이 제조 기술이 전해져 일본 제지술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우선 남쪽의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주변 강대국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551년 북제와의 전쟁 중이던 고구려 군대를 지원하러 온 돌궐족을 물리쳤고, 이듬해에는 백제 공격을 위한 원병을 보낸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어서 560년에는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진압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마침내 백제 사비성을 함락시켜 웅진 천도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나아가 곧이어 벌어진 여세를 몰아 10월에는 북한산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지었습니다. 이제 신라는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8세기

반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던 고구려는 오랫동안 지속된 내분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고, 급기야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거듭된 흉년과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민심이 동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영양왕은 즉위 직후 곧바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 민심 수습에 나섰으며, 동시에 강력한 통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668년 보장왕 27년에 이르러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일부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한때나마 고구려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다만 내부 분열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발해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편 백제도 의자왕 말년에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면서 국정이 어지러워졌다. 더욱이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이 금강 하구로 쳐들어오자,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맞섰으나 결과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대로 계백의 결사대가 전멸당하고, 의자왕은 항복 문서를 바치며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 상황

 

신라 통일 이후 신라는 한반도 내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당과 손을 잡은 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고, 당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면서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일본'이라는 나라와 교류를 하게 되는데요. 당시 왜국(일본)에서는 자신들을 천황이라 칭하며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두 나라는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서 서로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을까요?

신라 통일 이후 상황

당시 삼국시대 때 한국과 일본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삼국시대때까지만 해도 양국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나 7세기 중엽부터는 국력이 강성해진 고구려나 백제 등 주변 국가와의 전쟁 및 외교관계 유지에만 신경을 썼고, 668년 평양성 전투이후로는 사실상 남진정책을 포기하면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세계와는 단절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8세기 초 발해가 건국되면서 다시 동아시아 세계로의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9세기 중반 장보고 선단의 활약으로 해상무역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한·일양국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국에선 무슨일로 신라와 교류를 했나요?

 

713년 견당사 파견을 제안했을 때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절단 교환이 이루어졌는데요. 이때 사신 일행 가운데 일부인 혜초 스님이 인도 순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던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 지금의 쓰시마섬입니다. 이곳에서 약 1년간 체류하면서 그곳 주민들로부터 불교문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선진문물을 전해받았고, 이것이 훗날 《왕오천축국전》이란 책으로 남게되었습니다. 또한 이듬해 5월에는 승려 원측이 역시 배를 타고 입당했는데, 그때 동행한 유학생 김운경으로부터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각종 학문과 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이 나중에 유학승 원효대사에게로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신라는 왜국에게서 받은 도움을 갚았나요?

 

822년 진골 귀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무열왕 김춘추는 즉위하자마자 먼저 왜국에 대한 강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그해 10월 군사 2만명을 이끌고 직접 왜국 정벌에 나서는데요. 결국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었지만, 다음해 정월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의 군대가 합세해서 복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4년뒤인 828년에는 왕명으로 대야성을 공격하던 적장 품석 부부를 죽였고, 이로 인해 왜국과는 완전히 적대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유명한 일입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친 결과 현재 대한민국 영토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대국가인 ‘가야’를 병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일 양국민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야지역 지배층의 반발심을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