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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일본의 역사-청일전쟁

by 오늘이최고-기분좋은 오늘을 만들어 드립니다.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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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간에 벌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중심 세계질서'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킨 동양 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당들간의 영토분할경쟁을 촉발시킨 계기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다. 전쟁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중국 종주권에서 벗어났으나,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으로 바뀌어 인적·물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수난을 당하였다.

청일전쟁의 역사적 배경

 

조선에서는 1894년 1월9일 고부 군수였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에 더이상 참을 수 없어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조정에서 이 사건의 처리를 농민들에게 억울하게 처리함으로써 동학교단이 합세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 전개된다. 그리하여 이른바 제1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조선정부는 5월7일 장위영정령관, 훈련대장등을 역임한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무찌른 농민군은 5월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2일 전주가 함락되자 정부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레제독 예즈차오와 딩루찬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한다.

 

한편 일본 정부는 6월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보고받는다. 때마침 중의원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 5사단 오시마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이미 일본 정부는 도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새워 한반도에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자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이 설치되고, 동시에 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 선발대가 요코스카항을 출발 9일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한다. 그리고 6월 하순까지 8000명의 일본군이 경인에 집결한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6월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 화약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전재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 하기에 이르렀다.

 

청일 전쟁의 과정

 

일본은 자국내 정치적 혼란을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고, 청나라에 전쟁을 벌일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철병안 대신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일본의 예상대로 청나라는 제안에 거절했고, 일본은 준비했다는 듯 '제1차 절교서'를 청나라에 보내고 동시에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던 중 이홍장의 조정 의뢰에 따라 러시아와 미국이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지만 7월 중순 일본 정부는 청나라에 '제2차 절교서'를 보내는 한편, 영국과 영일신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본국 정부의 전쟁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한 뒤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과 김홍집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한다. 

청일전쟁의 과정

청일전쟁은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조선의 아산만 근처)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

 

 7월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린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1일에야 비로소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나라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조선의 충남 천안 외곽의 성환읍)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나라를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1일에야 비로소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나라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 육군이 9월15~17일 평양에 집결한 청나라군 1만 4000명을격파하고, 17일 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나라함대를 격침시켜 장악하였다.일본은 중국 본토도 공격하는데,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했던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뤼순 다롄을 점령하였다. 그다음 1895년 2월2일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에 있던 청나라의 북양함대기지를 공격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청나라는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강화회담을 서둘러 장인환을  전권대신을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 그러나 1895년 2월 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회담에서 일본측은 자국에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할 목적으로 청나라 전권대신의 위임장이 불완전하다며 그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까지 일본 육군은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그제야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교체하고 강화회담 제개를 서둘렀다. 3월20일부터 시모노세키에서 이토와 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해 강화회의를 다시 열었으나, 3월 24일 이홍장저격사건이 일어나 한때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 등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조약을 성립시켰다.

 

청일전쟁은 주로 청·일 간의 군사적 대결이었지만,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과 동학의병 간의 조일전쟁을 수반한 전쟁이기도 했다. 1894년10월 중순 전라 · 충청도에서 전봉준 · 손병희 등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쟁, 즉 조일 전쟁을 시작했다. 이 동학의병의 항일군사활동은 당시 랴오둥·산둥반도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일본측에서 볼 때는큰 위험요소가 되었다. 때문에 일본의 대본영에서는 이노우에 공사의 서울 부임과 함께 동학의병을 무력으로 조기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조선관군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토벌전을 벌였다.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조직적인 공세에 직면한 동학의병은 11월 18~19일의 목천 세성산 전투, 12월4~7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이어서 전봉준과 김개남등 동학의병 지도자들이 12월 24일 체포되어 조일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노우에 공사가 지휘한 동학의병 토벌작전이야말로 일본이 청일전쟁 중 조선에서 벌인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청일 간에 조인된 시모노세키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는 주선이 완전 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전례 등은 장래 완전히 이를 폐지한다'이로써 중국이 전통적으로 조선에 대해 행사해 왔던 종주권은 부정되었고 일본은 강화도 조약·제물포조약·텐진조약 등으로써 일관되게 추진해 온 조선에 대한 우월한 정치·군사·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둘째, 청나라는 랴오둥반도·대만·평후 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셋째, 청나라는 전비배상금으로 고평은 2억 냥을 일본에 지불한다. 넷째, 청나라는 일본에게 구미 열강이 청나라에서 누리는 것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함을 승인한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지 6일 후인 1895년4월23일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일본 정부에 대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라는 요구, 즉 삼국간섭을 하였다. 프랑스는 러불동맹의 동반자 입장에서, 독일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아시아 쪽으로 돌리게 만들어 중국분할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동조하였다. 결국, 5월10일 삼국의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인정한 일본 정부는 간섭에 굴복, 랴오둥반도 영유권을 포기하고, 대신 청나라로부터 배상근 3000만냥을 받기로 하였다. 삼국간섭을 계기로 일본은 러시아를 장래의 가상 적국으로 인식, 러일전쟁에 대비한 군비확장에 착수하였다.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는 랴오둥반도 남부를, 영국은 웨이하이웨이와 그 주변 지역을, 독일은 자오저우만 주변지역을 각각 조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가지 목적이 원읜으로 작용하였다. 먼저 조선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시설을 설치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구축된 불평동조약 체제를 한층 강화하는 게 필요하였다. 또한 본원적인 자본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이권을 획득하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강제로라도 일본의 보호국으로 묶어 두는 것이었다. 한편, 8월 20일에는 경부 · 경인 간의 철도부설권 및 군용전신선 관할권 등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보증한다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을, 26일에는 전쟁 중 조선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의 진퇴와 그 식량준비 등을 위해 편의를 제공한다는 조일맹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리고 15일과 26일에는 일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 정부 내에 배치한다는 약속을 조선의 친일정부로부터 받아냈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열강의 간섭과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 당분간 이들 조약의 즉각적인 실현이나 제도 개혁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는 삼갔다. 이에 따라 그 당시 집권하였던 김홍집 · 유길준 등 갑오개화파 관료는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국정개혁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양대첩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 정부에 대해 적극간섭정책을 택하기로 결정, 이를 실행하기 위해 메이지유신의 원훈이자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를 조선주재공사로 발탁하여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노우에 공사는 조선의 보호국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종과 박영효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정부를 꾸렸다. 그리고 조선 정부 내에 일본인 고문관을 배치하고, 조선 정부 제도를 일본식으로 개혁하는 등 조선 정부와 일련의 신조약을 체결한 뒤 500만 원의 정치차관 공여 등을 골자로 하는 적극적인 내정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특히 500만 원이나 되는 차관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을 영국 치하의 이집트와 같은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 이를 미끼로 조선의 중앙 및 지방정부의 재정권뿐만 아니라 일부 행정권까지도 장악할 것을 구상하였다.그러나 이 차관공여안은 1895년 2월 하순경 300만 원으로 줄어든 상태로 책정되었다. 차관 제공이 시기적으로 지체된데다 그 액수도 원래보다 적었으며 조건 또한 불리해, 박영효 같은 조선측의 애국적인 집권자들의 반발을 초래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더욱이 청일강화의 조짐이 대두된 1895년 2월 중순부터 러시아의 간섭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쟁종결외교에서 랴오둥반도의 할양 문제에 치중하기로 결심한 무쓰 외상은 2월 27일, 러시아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명실공히 보장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사실상 보호국화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를 경질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三浦梧樓]를 선발, 파견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서울 부임 후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 스기무라 서기관 등과 더불어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공사는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군 · 순사 · 장사 등을 동원하여 왕궁에 난입, 황후를 시해하였다.이사건으로 조선은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또한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나 일본은 곤궁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이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을 선포, 시행하자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화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자신의 거처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정권은 붕괴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 · 군사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청국 · 일본 · 조선 등 관련 각국간의 국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조정시킴과 동시에, 이들 각국의 근대화 방향을 결정지은 역사적 전쟁이었다. 일본은 삼국의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빼앗는 데는 실패했지만 청일전쟁 결과 대만 등 중국 영토를 식민지로 확보,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청국으로부터 얻어낸 배상금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반면에 청국은 이 전쟁 결과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상실한데다 열강의 격렬한 제국주의적 분할경쟁의 대상국으로 전락, 대내외적으로 왕조의 붕괴를 재촉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전쟁 중 일본의 보호국화 기도에 휘말린 조선왕조는 갑오경장이란 공전의 제도개혁을 겪음으로써 전통적인 지배체제가 약화되었고, 동학농민의병 등 반일민중의 타격이 컸다. 또한 일본군에 경복궁을 점령당하고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등 임진왜란 이래 최대의 수난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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