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막부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문민 정권은 주로 일본이 지배하는 천황과 그 섭정이 쥐고 있었는데, 이는 보통 조정이나 그곳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귀족 계급에 의해 임명된 것으로 군사 문제는 시민 정부의 후원으로 처리되었습니다. 1180년부터 1185년까지 겐페이 전쟁은 천황과 조정에 대한 오랜 대립의 일환으로 헤이와 겐지 사이에서 싸웠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헤이씨를 물리쳤지만, 그 승리로 민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천황과 궁정을 상징적인 인물로 정치적으로 강등시켰습니다. 1192년 요리토모와 겐지는 가마쿠라에 군사정권을 수립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운 정권입니다. 당시 천황이었던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하다가 패배하면서 교토에서 쫓겨나 현재의 도쿄 부근인 가마쿠라 지역에 새로운 정부를 세웠는데요. 이때 세워진 정치체제가 바로 가마쿠라 막부입니다. 이후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란을 일으켜 교토를 점령하며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1467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다시 교토를 장악하며 전국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무로마치막부
무로마치막부는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쿠(京都)로부터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세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입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후 약 60년간 지속되었는데요, 이 시대 동안 천황과 귀족 사이에서는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고, 지방 영주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습니다.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봉건제도가 확립되어 갔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처음엔 고다이고 천황에게 충성을 바쳤으나, 점차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천황을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도망쳤고, 이를 계기로 군사를 일으킨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192년 6월 9일 쇼군 직위를 획득합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193년 7월 8일 병으로 사망하면서 정권은 동생인 다다요시에게로 넘어갔고 그해 10월 15일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쇼군 지위를 인정받게 되지요. 다다요시는 형과는 달리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행정·사법·군사 제도 등을 정비함으로써 국가 체제를 완성시켰습니다. 특히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세금 징수 방식을 개선하였고,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 대장을 만들어 조세 수입을 확보하였습니다. 아울러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여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당시 극심하던 기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휼 기관인 진제장을 설치했고, 재해 지역에 대한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다다요시는 ‘관백’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다요시는 관백 자리에 오른 지 1년 만에 병사했는데, 이때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하였습니다. 유력한 경쟁자인 후지와라 히데히라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정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1221년 2월 22일 중신 회의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인 호리카와 상황이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분이 일어났고, 이번에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쇼군이 된 인물이 바로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무장이자 초대 장군인 겐지였습니다. 겐지는 집권 후 곧바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였는데, 주요 대상은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사무라이 계급이었습니다. 겐지는 우선 관직 체계를 개편하여 다이묘나 슈고다이묘 같은 상급 무사 계층을 약화시키고, 대신 하급 무사 출신 관료 집단을 육성하였습니다. 또한 신분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호적 및 족보 편찬 사업을 진행했으며, 불교 사원을 통제하며 승려들의 특권을 제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원 정리령을 내려 사유지를 몰수하거나 개간하도록 하였고, 상공업 진흥책을 시행하여 상인 자본을 성장시키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한편 대외 관계에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중국 대륙과의 무역을 확대하고자 송나라와 국교를 재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습니다. 나아가 원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고려와의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습니다. 다만 조선 왕조와는 여전히 교린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렇듯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겐지는 문화 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만요슈』라는 노래집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는 고대 일본 문학의 정수라고 평가받고 있지요. 이외에도 다도, 꽃꽂이, 정원 조성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을 남겼습니다. 1333년 5월 4일 겐지는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사후 장남인 요시미쓰가 가독을 이어받아 북조 최후의 무가 정권인 북조씨정을 수립하였으나 곧이어 남조측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두 나라는 전쟁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결과적으로 승리한 쪽은 남조였습니다. 마침내 1336년 여름 시코쿠 남부의 이요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북조씨정은 멸망하였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세 일본 역사상 유일무이한 무인 정권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하였던 무로마치막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무로마치막부가 성립될 무렵 동아시아 세계는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몽골 제국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크고 작은 독립 국가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 지역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동시에 국제 정세 역시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탄생한 무로마치막부는 강력한 무력을 기반으로 하여 동북아시아 일대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실제로 한때는 명나라 영토였던 타이완 섬을 점령하는가 하면, 규슈 북부에까지 진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외부 침략으로 인한 위기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몰락하였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역사-에도막부 (0) | 2023.08.06 |
---|---|
일본의 역사-전국시대부터 통일까지 (0) | 2023.08.06 |
일본의 역사-임나일본부설 (0) | 2023.08.03 |
일본의 역사-나라시대 (0) | 2023.08.03 |
일본의 역사- 선사시대부터 6세기까지 (0) | 2023.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