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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일본의 역사-임나일본부설

by 오늘이최고-기분좋은 오늘을 만들어 드립니다.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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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정벌하고, 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야를 정복하여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었다는 주장을 말합니다. 이 주장은 니혼쇼키에 근거하였으며, 18세기 이후 일본의 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확실한 사실로 믿어져 왔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에게 더욱 사실화 되로록 지시하였고, 일제는 이 주장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광개토태왕 비문이나, 칠지도 또는 중국의 사서 등과 고고학적 유물 등을 동원 하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이것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나?

 

「일본서기」에는 기원전 1세기 경 임나인이 왜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잇으나, 그후 약 200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고후 황후 49년(369년)에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처음 군사를 파병한 이후에 관계된 기사가 많이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임나를 정복한 후 백제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왜는 계속해서 군사를 주둔했다고 합니다. 463년부터는 '고쿠시'또는 '니혼부'를 두어 미마나왕과 함께 다스렸고, 562년에 신라의 임나관가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복속과 함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 후에도 신라, 백제는 646년까지 임나의 몫까지 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듯 「일본서기」의 내용만을 토대로한 임나일본부설은 문제점이 많습니다. 먼저 이것은 한국 고대사 전체의 체계를 뒤바꿀만한 엄청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의 역사서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의 박혁거세 초년 때부터 왜병 침입의 사건 기록이 총 48회나 나오고, 또 왜로 인한 고통을 지나칠 정도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또한 불과 8년의 차이를 두고 먼저 편찬된 「고지키(712년) 」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내용이 정말 사실이라면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본서기는 물론, 고사기나 그 이전의 어느 역사서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았을까요?  

마지막으로 「일본서기」가 가진 사료적 가치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새로 만들어진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 일본을 최고로 인식하게 만드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단단히 세우기 위해 편찬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의 저자인 오호나야스마로는 백제계 출신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국가가 세워질 때 특별한 상황과 함께 신라 중심의 한반도에 대한 미묘한 인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백제와 일본의 역사가 섞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일본서기」의 이 부분에서 '일본', '고쿠시'라는 용어가 7세기 이후에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가 쓰여질 당시 혹은 후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임나일본부설' 정당화를 위한 노력

 

일본인들은 이 설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내기 위해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내용을 예로 듭니다. 일단 광개토태왕릉비문은 마모된 부분이 많아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사까와가 떠왔다는 탁본은 임시요법인 '쌍구가묵본'으로 조작이나 왜곡이 용이했습니다. 또 이것을 주도한 조직인 일본 군부였으며 이들은 비밀리에 연구하여 발표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 문제삼는 내용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 문제삼는 내용

문제가 되는 가장 큰 것은 신묘년조의 내용이다.[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 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라는 본문의 내용을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건너와 백잔을 공파하고...신라...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6년 병신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인데, 이것을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가라 신라를 공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또, 영락 9년~10년 사이.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인데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고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 국경에 들어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신라 내물왕)을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며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하는 부분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무렵에 전개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왜의 세력들은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거나 능력이 없었고, 작은 지역조차 통일하지 못한 소국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이와 같은 일본 학계의 견해를 반박하였습니다. 정인보(鄭寅普)가 대표적인데, 그의 경우 비문의 주인공이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이라는 점을 강조였습니다. 그리고 비문에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따라서 비문의 주인공을 고구려와 광개토왕으로 상정하고 고구려의 입장에서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해석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남북한의 역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이야기라는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4세기 말 5세기 초 동아시아는 그 중심부가 중국대륙이었습니다. 화북지방에서 5호 16국의 흥망이 거듭되었고 남쪽에서는 동진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420년 송이 건국되면서 남북조 시대가 되었고, 589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대분열 시대를 겪었습니다. 결국 4세기 초부터 6세기 후기까지 중국은 자체분열로 인하여 내부정리에 힘을 쏟는 대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중국대륙이 통일되면 한반도의 힘이 약해졌고 중국이 분열되면 한반도의 힘이 강해져 그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4세기 말에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후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즉위 6년에는 수군을 투입 백제의 58개 성700여 촌을 탈취하였습니다. 이처럼 고구려가 압박하고 신라가 동조하며, 동진과는 외교관계가 힘들어짐에 따라 백제는 왜와 동맹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야지역은 고대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가는 출구 역할을 해 왔으므로 고구려는 남해일부까지 해양으로도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그런데 왜는 백제,가야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므로써 고구려의 대왜전에 명분을 제공하였고, 광개토태왕 14년인 404년 백제와 왜 연합군이 수군을 동원하여 현재 황해도 지역인 대방계를 침입하였습니다. 당연히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의 역학 관계상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마네 지역의 이즈모등에서 고구려 문화의 은적이 발견되었다면 고구려가 동해남부나 남해동부를 통해서 일본 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의 정치상황과 군사적인 역학관계 등을 볼 때 광개토태왕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존재를 확대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임나일본부설에 적용하는 것은 당시 국제관계의 대세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시대 역학관계의 주된 축은 고구려와 백제이었으며, 신라,가야,왜 등은 이 관계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축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즉 일본은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문화능력도 현저히 모자랐으며, 교통수단과 운송능력도 부족했었기에 임나일본부설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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