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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의 관계

9세기 한반도의 상황과 일본과의 관계

by 오늘이최고-기분좋은 오늘을 만들어 드립니다. 2023.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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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한반도의 상황

 

9세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입니다. 이 시기는 신라 하대라고도 불리며, 통일신라 이후 약 1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었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후삼국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통일신라말 고려초인 9세기 후반~10세기 초에 한반도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서로 경쟁하던 시기였어요.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할 나라는 바로 후백제와 후고구려입니다. 두 나라는 모두 통일신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치열하게 대립했어요. 하지만 결국엔 멸망했고 이후로는 다시 삼국통일이라는 이름 아래 고려로 합쳐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후삼국시대

후삼국 시대는 말 그대로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이후 다시 세 나라가 정립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원래 고구려 출신인 궁예는 송악 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견훤은 완산주를 중심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건국과 성장과정은 어떠했나요?

후백제는 견훤이 세운 나라로,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건국되었어요. 처음에는 백제 부흥을 목표로 했지만 점차 힘을 키워나가면서 고구려계 유민들을 흡수하였고,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문화 수준 또한 높아졌어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후백제는 점점 강력해졌고, 왕건에게 패하기 전까지 후백제는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해요.

 

후고구려의 건국과 성장과정은 어떠했나요?

후고구려는 신라 왕족 출신이었으나 몰락한 진골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던 궁예가 세웠어요. 궁예는 어릴 때 유모의 손에 자라면서 왕실로부터 버림받은 왕자라는 설움을 겪어야 했지요.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세상을 원망했고, 권력욕에 사로잡혀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고, 신하들마저 떠나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숭겸 장군과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가 세워지게 됩니다. 궁예는 도망치다가 평강에서 피살되었습니다.

 

왕건은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하였나요?

궁예나 견훤 모두 자신만의 개성있는 정책을 펼쳤으나,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고, 특히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난폭한 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반면 왕건은 포용정책을 펼치며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결혼정책을 실시하여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수많은 공신 및 호족세력을 등용했습니다. 또한 북진정책을 펼쳐 발해유민을 받아들이고,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왕건의 뛰어난 외교술과 화합정책 덕분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삼국통일

발해 유민이란 누구인가요?

발해는 고구려 멸망(668년) 후 30년이 지난 698년에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국가로, 중국 동북부지방에서부터 만주 일대까지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었습니다. 그러나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으며, 일부 지배층은 고려로 망명하거나 저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발해 유민이라고 합니다.

 

9세기 한반도와  일본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요?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각각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요, 먼저 후백제는 일본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외교관계를 맺었고, 무역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어요. 반면 후고구려는 일본보다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였는데요, 이를 통해 당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먼저 8세기 중반까지는 나라 시대였고, 794년~911년까지가 헤이안 시대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천황이 통치하던 시기는 645년~794년까지로 약 100년간이었어요. 나머지 기간 동안은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다고 하는데요, 이를 다이묘문화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다가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고 133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후삼국시대에는 일본도 권력다툼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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