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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한국사 이야기-고려의 탄생

by 오늘이최고-기분좋은 오늘을 만들어 드립니다.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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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세운 왕건은 어떤 인물인가

개성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처음에는 궁예의 신하였다. 호족인 아버지 왕륭의 지원도 컸지만 출신 배경도 좋고 인물도 출중하고 용기와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신임을 받았다. 궁예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중요한 자리에 맡겼다. 견훤의 후백제와 신라 세 나라가 다투던 시기. 왕건은 궁예를 대신하여 연이어 군사를 이끌고 충정하였는데 특히 세력 확충의 요지이자 교두보였던 후백제 지역의 나주 공략에 여러 차례 나선 것은 그의 세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주를 자기 세력권으로 만들고 그곳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또 왕건은 전공을 많이 올려 913년 시중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이것은 궁예가 전적으로 왕건을 신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왕건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꾼 뒤, 날로 이상 성격으로 변해가 신하들을 의심하고 오만한 행동을 일삼는 것을 보고 시중으로서 내정을 돌보는 것보다는 장군으로 변방으로 나가 정복 활동을 하는 일에 더 열심을 냈다. 궁예와 가깝게 있는 것보다는 떨어져 공을 세우는 것이 훨씬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왕으로

한편 궁예는 포악함이 심해져 나라를 유지해 나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태봉의 장군 신숭겸, 홍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918년 왕건은 태봉이라는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새 나라 시작하게 된다.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이나 태봉의 궁예와 다른 점은


고려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표명하고 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운 이듬해에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송악은 왕건의 고향이다. 궁예와 태봉의 흔적을 없애고 새로운 시작에 알맞은 곳이었다. 왕건은 신라에 대하여 유화정책을 썼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으나 버림을 받았기에 신라를 원수로 삼았고 늘 신라 또는 경주를 '멸도'라고 부르면서 그 멸망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주민들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마구 죽였다. 하지만 궁예 개인의 복수심은 신라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지배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하급 벼슬아치들과 농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된다. 
신라를 대하는 견훤의 태도 역시 궁예와 비슷했다. 견훤은 왕건이 신라에 대해 온건 정책을 펼치자 신라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해 경주를 불바다로 만들고 신라의 무수한 귀족과 벼슬아치를 죽이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다. 끝내 경애왕마저 죽인 뒤 경순왕을 새로 세우고 많은 보물과 여자들을 빼앗아 완산주로 돌아왔다. 신라 사람들이 백제를 두려워하고 견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 것이다. 견훤은 백제 유민들의 감정을 대변한 것이었으나 현실 정치가로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왕건은 달랐다. 그는 나라를 세운 뒤 신라 왕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신라의 망명해 들어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대하였다. 특히 견훤이 경주를 불바다로 만든 뒤 왕건은 무도한 견훤을 징벌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출정하여 대구 근방인 팔공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왕건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충실한 부하인 신숭겸을 잃는 등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3년 후 왕건은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꺾어 전세를 역전시킨 뒤 경주를 방문하여 경순왕을 극진히 위로하고 신하들을 회유하였다. 왕건은 견훤과는 달리 이러한 방식으로 신라에 대한 보호정책을 썼다. 신라의 마음이 왕건에게로 기울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결국 신라는 고려에 투항하게 된다.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이나 태봉의 궁예와 다른점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최후와 후백제의 견훤의 최후는 어땠을까

경순왕은 후백제의 압박으로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고려에 투항하려 했다. 고려는 신라와 한 번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투항을 유도하는 저액으로 신라가 고려에 나라를 바치도록 하였다. 경순왕과 신하들은 수레에 많은 보물을 싣고 송경으로 와서 왕건에게 무릎을 꿇었다. 왕건은 경순왕을 위국 공신 낙랑 왕으로 삼고 식읍 8천 호를 주어 송경에서 살게 하였다. 왕건은 맏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여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었다. 경순왕은 송경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신라의 귀족들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또 경순왕의 딸은 고려 5대 왕 경종(왕건의 손자)의 왕비가 되었다. 경순왕은 왕건과 겹사돈까지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 호화롭게 살았던 것이 당연하다.

 

후백제의 견훤은 아들들과 갈등이 많았다. 넷째아들 금강을 특히 총애하였던 견훤은 왕위를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였다. 큰아들 신검과 작은아들 양검, 용검 등은 자신들과 배다른 동생인 금강을 왕위로 삼으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분노했다. 전장으로 다니며 생사를 가르고 공을 세우고 다녔지만 정작 왕위는 금강이 이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또한 견훤은 말년에 이르러 나태와 안일에 빠져있었다. 고려에 계속 밀리고 있었고, 신라에 대해서도 온건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에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큰아들 신검은 반란을 일으켰고 견훤을 금산사의 별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견훤은 유폐된 지 한 달쯤 후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로 넘어간다. 왕건이 견훤을 극진히 대접하자 견훤은 감격하였으며 아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의 모든 운명을 왕건에게 맡긴다. 왕건은 견훤과 견훤의 사위 박영규(견훤을 따라 망명함)의 지원에 힘입어 심검이 이끄는 군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한다. 936년 6월 이 패전으로 후백제는 멸망한다.

고려 왕건의 통합정책

신라 항복 1년 만에 완전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후백제는 스스로 무너졌다고 봐야 옳다. 왕건이 신검 세력도 포용함으로써 견훤의 복수심을 무색하게 했다. 왕건의 포섭정책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었으나 삼국 통일의 원동력은 사실 따로 있었다. 그는 여러 세력을 규합하는 데 모든 역량을 결집하였다. 왕위에 오르자 그는 먼저 길목의 도둑들 즉 봉기한 농민들을 일컫는 것인데 이들을 포용하도록 한다. 또한 호족 세력에 주목하였는데 이들은 신라 말기에 사회의 중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앙에서 밀려난 진골 귀족이나 하급 벼슬아치인 6두품 출신들이 지방 세력화하였다. 이들은 골품제를 없애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 중 고려에 협조한 것으로 보이는 최치원과 후백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최승우 등과 고려 초기에 국가 정책 결정에 참여한 최언위, 최은함,최승로 등이 있다. 왕건은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왕씨 성을 내려주고 혼인 관계를 맺어 혈연공동체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호족들을 포섭했다. 왕건은 왕권을 강화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지방을 순회했다. 호족들을 출세하기 위한 도구로 누이나 딸을 바쳤다. 왕건은 은근히 이를 조장하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혼인을 맺었다. 호족 쪽에서는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만들려는 음모였고, 왕건 쪽에서는 호족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술책이었다. 그 결과 왕건은 2명의 왕비와 27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리하여 왕건은 25명의 아들, 9명의 딸을 두게 되었다. 25명의 아들들은 25명의 호족 집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결국 후계 구도에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불씨를 남기게 된다. 후대 왕들 2대 혜종은 4명, 3대 정종은 3명, 8대 현종은 13명, 11대 문종은 5명의 부인을 두어 호족들과 이리저리 연관을 맺었다. 이것은 외척들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불러왔고, 왕실과 호족 문벌끼리 혼인을 맺는 폐쇄적인 근친혼의 풍습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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