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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일본의 역사 - 교육

by 오늘이최고-기분좋은 오늘을 만들어 드립니다.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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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교를 통한 공교육

일본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회구성원의 비율을 식자율이라고 한다. 식자율은 한 국가 또는 사회의 지적 수준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의 하나이다. 구성원들이 문맹에서 벗어나 문자해독력을 습득하는 것은 그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계몽, 진보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근대화시기에 각국이 문맹퇴치에 애를 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에도시대 일본은 문맹률이 동시대 서유럽 국가들에 비추어도 낮은 사회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엄정히 조사하고 통계를 낸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19세기 초반 에도 인구의 70~80퍼센트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에도에 국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대 국가에서도 유엔의 인간개발보고서가 문해율 70~80퍼센트를 '보통'수준으로 분류할 정도이니 70퍼센트의 식자율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에도시대 일본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자. 최초의 원어민 영어교사였던 래널드 맥도널드는 그의 저서 '일본회상기'에서 "최상층에서부터 최하층까지 모든 계급의 남녀, 아이들이 종이와 붓과 먹을 휴대하고 다니며 곁에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영국의 외교관이자 여행가·작가로 인도, 중국 등을 두루 경험한 로런스 올리펀트는 1858년 및 186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 사회를 관찰한 후 "편지로 서로 의사를 전달하는 습관은 영국보다도 더 폭넓게 퍼져 있다. 일본인들은 우편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라도 하듯 서로 짧은 편지를 주고받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에도시대의 교육을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무가교육과 서민교육이 그것이다. 무가교육의 핵심기관은 각 번 정부가 설치한 번교이다. 1669년 오카야마번에 오카야마학교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8세기 중반이 되면 250여개에 이르는 학교가 세워진다. 번교는 각 번의 무사 계급인 번사 자제들을 위한 지배층의 핵심 교육기관이었다. 번사의 자제들은 대체 7~8세가되면 번교에 입학하여 기초적인 읽기 및 쓰기와 함께 소학, 효경등 유교 경전과 학습서를 교과서로 하여 문과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13~14세기가 되면 검술 등의 무예와 병법 등 무과를 교습하여 문무를 겸비한 사관 또는 관료로서의 소양을 배양한 후 17~19세기 정도에 졸업한다. 번교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번의 사정과 처지에 맞는 인재 육성 교육이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각 번의 입장에서 자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수요에 맞는 고등교육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세기 말 이후 각 번이 처한 환경과 필요에 따라 의학, 양학 등 신학문을 교과 과정에 편입하는 번교가 늘어난다. 아울러 폭넓은 인재 발굴을 위해 무사계급이 아닌 평민의 자제들에게도 입학의 문호를 개방하는 번교가  등장한다. 이러한 번교 개력의 대표적 사례가 사쓰마번의 조시칸이다. 사쓰마번은 지정학적 요인으로 대륙 정세에 대한 정보의 입수가 빠르고 서양 세력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곳이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간파한 사쓰마번은 기존의 유교와 무예 중심의 전통교육에서 탈피하여 신시대에 걸맞은 인재 육성을 위해 번교의 커리큘럼과 입학자격을 일신한다.

사쓰마번은 국내에 앉아서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1865년 사쓰마번은 영국에 세명의 사절단과 15명의 유학생으로 구성된 건영사절단을 파견한다. 사절단은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네덜란드, 벨기에 등 구주를 순방하고 일부는 미국까지 건너가 유럽의 정세와 과학기술을 체험하며 일본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유럽의 지도자들과 의견을 교환한다. 사쓰마번은 삿초동맹의 일원으로 메이지 정부 수립의 주역이기도 하다. 중앙정부보다 한발 앞서 행동하고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춘 지방정부가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된 것이다.

일본의 역사-교육

막부의 교육이 도쿄대학으로

지방정부에 의해 설립된 번교 외에 중앙정부인 막부가 설립한 일종의 국립 중앙교육기관도 에도시대 공교육의 중추를 이룬다. 1600년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도록 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 을 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우에노에 건립한 공자묘를 간다의 유시마로 이전시키고 강당·기숙사 등의 교육시설을 부설하여 '유시마세이도'라고 이름지었다. 유시마세이도는 막부의 후원을 받아 막부의 가신단 자제들과 각 번으로부터 파견된 유학생이 수학하는 반공반사의 교육기관이었다. 유시마세이도는 1797년 하야시 가문의 사숙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제거하고 막부의 직할 교육기관으로 편입되면서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이름이 바뀐다. 쇼헤이란 이름은 공자의 출생지인 노나라의 항평항에서 따온 것이다. 이름처럼 쇼헤이자카학문소는 막부 통치철학의 기반인 주자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최상위 관학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막부는  실용 학문을 위한 연구 교육기관도 별도로 설립하였다. 반쇼시라베쇼는 1856년에 만들어진 막부 직할의 양학 연구기관이다. 막부 직할 개항지인 나가사키 등지로부터 서양 소식이 전해지고 난학의 중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서양 학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863년 '가이세이쇼'로 이름이 바뀐다. 주요 연구 과목으로 네덜란드어를 중심으로 하는 어학, 현대의 금속공학에 해당하는 정동학, 기계학, 물산학, 수학 등이 있었다. 한편, 종두 예방 접종 등 서양의학의 성과와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면서 1861년 서양의학 전문기관으로 막부 직할의 '의학소'가 설치되었다. 에도 중기 이후 의사들은 신지식인으로 크게 존중받았으며,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의학을 비롯한 각종 서구의 과학 문명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의사들은 막부에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권유하면서 일본 사회의 지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이들의 활약이 막부에 의한 의학소 설립으로 결실을 본 것이다. 막부의 실권에 따라 유신 정부에 접수된 의학소는 1868년 의학교로 개칭되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라는 일대 격변을 맞아 쇼헤이자캬 학문소, 가이세이쇼, 의학소는 유신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따라 각각 쇼헤이학교, 도쿄가이세이학교, 도쿄의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변신을 모색한다. 이들 막부 직할 3대 교육기관은 1877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인 도쿄대학으로 통합된다.

 

막부의 교육 -서민교육의 중심 '데라코야'

에도시대의 서민교육은 서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유지, 발전을 위해 지식과 교양을 갖춰야 한다는 사회적 의식이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교육, 직업생활에 필요한 봉공교육, 공동생활에 필요한 도덕교육 등이 서민 교육의 중심 내용으로 강조되었다. 

서민교육의 중심이 된 것은 '데라코야'라는 사설교육기관이다. 데라코야라는 이름은 에도시대 이전의 중세에 주로 사원이 교육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데라코'라고 부른 데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에도시대 초기 교토등 사원의 영향력이 강한 일부 지역에 개설되어 있던 데라코야는 에도 중기 이후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해 에도 말기에 이르면 에도 · 오사카 · 쿄토의 삼도는 물론 지방도시, 농어촌 등의 낙후지역까지 전국에 보급되었다. 데라코야 교육은 실용적이고 수요자 중심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오히려 현대의 획일화된 기초교육에 비해 훌륭하다. 데라코야의 고육 방침의 핵심은 글을 읽고, 쓰고, 소로반(주판)을 할 줄 알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구체적 방법 중 하나는 '데나라이'이다. '시쇼'라 불리는 교사가 직접 손으로 쓰고 읽어주면 학생들은 종이, 붓, 벼루, 먹을 필수품으로 지참하여 교사의 지시에 따라 익숙해 질 때까지 글을 쓰고 읽기를 반복하였다. 학년제, 표준 교과과정이 없기에 모든 학생은 한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총명한 학생들은 진도를 빨리하여 또래보다 더 수준 높은 내용을 교습받을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습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교과서로 주로 사용된 것은 '오라이모노'였다. 오라이모노는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다방면의 주제에 대해 평이한 문체의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기술된 문집니다. 거의 모든 방면의 수천 종의 오라이모노가 교과서로 존재하였다.


실용적 지식과 더불어 서민들 각자의 사회 구성으로서 배양해야 할 심성과 덕목이 주요 교육 목표로 강조되었다.  예를 들면 '산은 높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부자이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었야 비로소 훌륭한 것이다.' ,'노인을 자신의 부모처럼 공경하고,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등등이 그 가르침의 내용인데, 이러한 관심과 전통은 현대일본 사회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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